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문단 편집) == 초기 협상 ==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제국 전역에 퍼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4월 테제에서부터 주장했던 '무병합 무배상의 민주적 강화' 논리에 따라 1917년 12월부터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제국]] 곳곳에서 러시아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족들은 제정이 무너지기 무섭게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도 1917년 11월 '전 러시아 내 민족의 권리 선언'을 통해 민족들의 자치권과 자결권[* 독립을 포함한다.]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이만큼 일이 커지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독일 제국은 이러한 독립 운동을 도와 러시아의 힘을 완전히 빼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의 원칙에 따라 군대의 동원을 해제하고 이를 자발적인 '민병대' 조직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실현했는데 당연하게도 군인들은 참전보다는 전쟁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해서 군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굴리는 군대 중 그나마 쓸만한 군대는 [[라트비아]] 소총 연대[* 연대라고 하지만 규모는 일반적인 연대보다 훨씬 컸다. 이들은 나중에 [[러시아 내전]]에서 맹활약했다.] 정도였다. 특히 주요한 철강과 석탄 산지였던 [[우크라이나]]의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다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운 반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기네 영토가 멋대로 떨어져 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도 입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15만㎢ 정도의 영토와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초기 조약을 받아들여 한 숨 돌릴 여유를 가질 것을 요구했으나, [[니콜라이 부하린]]과 [[레프 트로츠키]] 등은 전쟁의 종결은 노동자들의 세계 혁명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오죽하면 트로츠키가 "우리는 인민들 앞에서 몇 건의 성명서만 발표한 후, 이따위 곳(외무부)은 폐쇄해버릴 것이다."[[http://sonnet.egloos.com/4010673|#]][*폐쇄] 라고까지 했을까... 말 그대로 이상에 젖어있던 상황. 마침내 트로츠키는 '''무전쟁-무평화'''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며 독일의 최후협상 요구를 거부했고, 최후 통첩일인 [[2월 10일]]까지 끝내 소비에트 러시아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 동안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이미 조약을 맺고 있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2월 21일 레닌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붉은 군대|적군]]의 소집을 요구했고, 2월 23일 적군이 곳곳에서 소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